“월급 꼬박꼬박 주고 바람 안피웠는데 이혼?”

“월급 꼬박꼬박 주고 바람 안피웠는데 이혼?”
[중앙일보] 입력 2012.03.08 04:30 / 수정 2012.03.08 09:08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곽배희 소장은 ‘호주제 폐지’를 상담소 56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꼽았다. 사진은 2005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호주제 폐지안이 통과된 뒤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기뻐하는 모습. 왼쪽에서 둘째가 곽 소장이다. [연합뉴스]곽배희(66)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을 만났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된 유엔의 공식 기념일인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앞두고서였다. 우리나라 가족법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데 앞장서 온 그는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핍박받고 학대받았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 선 것”이라며 “이는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성의 인권이 탄압받는다면 남성 편에서 나설 것”이란 그에게 가정 안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는 길을 물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법과 제도에서 남녀평등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

 “70~80% 정도는 달성됐다고 본다. 하지만 남계 혈통 중심으로 된 뿌리가 워낙 질기게 박혀 있어 아직도 개정할 법이 여럿 있다. 일례로 연금법이 그렇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고 아내가 전업주부였던 경우 이혼을 하면 연금은 고스란히 남편 몫이 된다. 남편이 직장 다닐 동안 뒷바라지했던 아내의 역할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 결혼 생활 중 이룬 재산에 대해선 설사 남편 명의로 돼 있더라도 아내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부 재산제’를 개정해야 한다. 현 제도에서는 이혼을 해야만 아내가 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자녀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규정한 민법 781조 1항도 바꿔야 한다. 현재는 이 규정에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단서를 붙여둔 상태다. 조항 자체를 ‘자녀가 출생하면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바꾸는 게 옳다.”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의 고민은 주로 무엇인가.

 “부부문제에 대한 상담이 가장 많다. 양성평등 의식에 대한 남녀 차가 크다. 특히 40~60대 부부들에게 심각한 문제다. 매일 저녁 가계부 검사를 하며 아내에게 잔소리하고, 외식할 땐 뭐 먹겠느냐 한번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주말이면 삼시 세 끼 아내에게 밥 차려달라는 남편이 있었다. 아내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이혼하겠다고 나섰다. 상담을 하러 와서 남편이 하소연하더라. ‘20년 넘게 열심히 직장 다니며 꼬박꼬박 월급 갖다 줬고, 바람도 안 피웠고, 폭력도 안 썼다. 그런데 아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냐. 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훨씬 학대했는데도 대접받고 살았는데…’ 참 딱한 경우인데, 이런 사례가 흔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이 상담소 로비에 놓인 ‘정의의 여신상’ 옆에 섰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공평과 균형 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남녀 간의 의식 차이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성들은 조금 침착했으면 좋겠고, 남성들은 변화를 인정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양성평등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여성들의 권리까지 누리고 살았던 남성들에게 금방 변하라고 하는 건 무리다.

 결혼생활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 했던 ‘2인3각’ 종목과 비슷하다. 내가 달리기 선수라도 짝과 속도를 맞춰 달려야 한다. 세상이 다 바뀌었더라도 내 남편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한 세대 만에 변화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줘야 내 가정 안에서 양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 ‘침묵은 금’이라고 배우고 자란 남편에게 매일 ‘사랑해’라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 휴일마다 꼭 함께 외출하자고 요구하는 것 등은 솔직히 권하고 싶지 않다.

 그동안 기득권층으로 살았던 남성들은 현상유지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남성들이 ‘고치는 건 싫고 차라리 죽어버려야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체면과 자존심 때문이다. 그렇게 허무의 늪에 빠져 죽겠다 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 변화에 적응하는 게 남성들이 살 길이다.”

 -가치관이 바뀌는 과도기니 여성도 남성도 모두 힘들다.

 “결혼 전 교육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돌아보고 반성해야 잘 꾸려갈 수 있는 게 결혼생활이다. 또 부부관계에서는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혈연 중심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고,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깊숙이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대화를 통한 의사 소통이 절실하다.”

 -한 부모 가정, 독신 가정, 다문화 가정 등 가정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상담소의 역할도 다양해져야 할 것 같다.

 “미혼모 가정이 점점 늘고 있는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식은 낳고 싶지만 결혼은 싫다는 그들에게 무조건 ‘그건 나쁜 짓이다. 결혼하라’고 몰아세울 순 없다. 미혼모가 미혼부에게 생활비를 받을 수 있도록 법적인 보호장치를 만드는 일 등이 앞으로 시급한 과제다. 또 자식의 부양을 받지 못하는 노인 등을 위해 후견인을 지정해 주는 ‘성년후견제’도 빨리 시행돼야 할 제도다.”

“집안일 손도 안 댄 남편 인정해줬다”는 곽 소장의 인격 평등론

여성운동을 한다 하는 사람들이 흔히 받는 오해가 있다. 강하고 까다로워 개인사가 굴곡졌으리란 편견이다. 곽배희 소장은 그런 악의적인 선입견을 뒤집는 인물이다. 전북 운봉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1976년 결혼해 37년째 가정생활을 평범하고 순탄하게 꾸려오고 있다. 남편은 김종철(68) 전 연합뉴스 사장. 그리고 올해로 서른다섯 살인 외아들이 있다.

 곽 소장은 자신의 가정을 두고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평등이 기계적인 평등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인격적인 평등을 의미한다. “종갓집 종손인 남편이 집안일에 손도 안 댔는데, 그건 인정해줬다”니 실로 통 큰 양보다. 이들 부부의 평등 의식은 의견이 대립됐을 때 빛이 난다. 일례로 정리정돈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뭐든 제자리에 둬야 한다”는 곽 소장에게 남편은 “대세에 아무 지장 없는 일”이라며 맞섰다. “많이 싸웠죠. 토론을 하듯 서로 논리를 내세우며 강하게 대립했어요. 결과적으로 의견 통일이 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됐죠.” 누가 누구를 윽박지르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그게 평등의 요체였던 것이다.

 결혼에 대해 그는 “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게 그가 ‘결혼예찬론’을 펼치는 이유다. “결혼하면 힘든 순간이 더 많아지지만 그런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너그럽고 속 깊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설명이다.

 곽 소장은 77년 아들을 낳아 엄마가 됐다. 육아에 대해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은 못하겠더라”고 말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곽 소장이 상담소 일을 하는 시간에는 YWCA 육아도우미가 아들을 돌봤다. 집안일 때문에 아이에게 소홀해질까 우려해 도우미에게 살림엔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곽 소장은 아들이 갓 돌이 지났을 무렵 남편 친구 가족들과 도봉산으로 소풍 갔던 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혹 지저분하지는 않을까, 혹 바람을 쐬어 감기가 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아이를 땅에 내려놓을 수가 없어 서너 시간을 계속 안고만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내 목숨인 양 키웠다”지만 후회는 남는다. 곽 소장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가만히 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는 아이가 하루 학원에 빠지면 당장 불량아가 되는 줄 알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 후회마저도 참으로 ‘보통 엄마’처럼 평범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기자의 블로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기자의 블로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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